발해 (渤海)
잊혀진 '해동성국'을 찾아서
7세기 말, 고구려의 유산 위에 세워져 228년간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나라, 발해.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하며 드넓은 영토를 호령했고, 당나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넘나들며 발해의 다채로운 모습을 탐험합니다.
정체성: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다"
발해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핵심은 '고구려 계승 의식'입니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여겼고, 이는 외교 문서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명확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주변국의 기록은 때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며, 이는 오늘날까지 역사 논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두 개의 기록, 하나의 진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중국의 두 역사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다르게 기록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사실의 오류가 아니라, 당시 당나라가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고려별종 (高麗別種)"
먼저 편찬된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로 명시합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계승했음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발해의 정통성을 뒷받침합니다.
땅 속에서 찾은 증거
문헌 기록의 논쟁과 별개로, 땅 속의 유물과 유적은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깊이 계승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특히 지배층의 무덤과 수도의 구조에서 고구려의 흔적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정혜공주묘 (貞惠公主墓)
굴식 돌방무덤 구조와 천장을 삼각형으로 쌓아 올린 '평행삼각고임' 방식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입니다. 이는 발해 지배층이 고구려의 장례 문화를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
수도 상경의 궁성 배치는 고구려 평양 안학궁의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또한, 궁전 터에서 발견된 '온돌' 시설은 고구려의 주거 문화를 계승한 결정적 증거로 꼽힙니다.
국제 관계: 동아시아의 당당한 주역
발해는 고립된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당, 신라, 일본 등 주변국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복잡하고 역동적인 외교 관계를 펼쳤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긴밀한 교류는 신라를 견제하고 동아시아 내에서 독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려는 발해의 전략적 의도를 보여줍니다.
VS 당 (唐)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결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국임을 선포했고, 국익이 침해될 때는 당나라의 등주를 직접 공격(732년)하는 등 강력한 군사적 자신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과 대등한 독립 국가였음을 증명합니다.
VS 신라 (新羅)
한반도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두 나라는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일본과 연대하여 남쪽의 신라를 견제하는 등 복잡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VS 일본 (日本): 특별한 파트너십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신라-일본 관계보다 훨씬 활발했습니다. 아래 차트는 양국에 파견된 공식 사신단 횟수를 보여줍니다.
문화유산: 융합과 창조의 미학
발해 문화는 한마디로 '융합의 산물'입니다. 고구려의 강건한 기풍을 바탕으로 당의 세련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말갈의 독특한 요소를 더해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건축, 공예,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복합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정효공주묘 (貞孝公主墓)
벽돌로 무덤을 만든 것은 당나라의 영향이지만, 무덤 위에 탑을 세운 것은 발해 고유의 양식입니다.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창조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연꽃무늬 막새기와
기와에 새겨진 힘차고 입체적인 연꽃무늬는 고구려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발해 건축의 미학적 수준과 고구려 문화와의 연속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돌사자상
정혜공주묘에서 출토된 돌사자상은 강렬한 인상과 사실적인 근육 표현이 돋보입니다. 당당하고 기백 넘치는 발해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발해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대형 석등
상경용천부 절터에서 발견된 6m 높이의 거대한 석등은 발해에서 불교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웅장한 규모와 정교한 조각은 발해의 발달된 석조 기술을 증명합니다.
이불병좌상 (二佛並坐像)
나란히 앉은 두 부처를 표현한 이 불상은 발해의 독특한 불교 신앙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고구려 불상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발해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상경성 주작대로
수도 상경용천부의 중심 도로는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 격자형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제적인 도시를 건설했음을 보여줍니다.
멸망과 유산: 갑작스러운 종말, 꺼지지 않은 불씨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는 926년, 건국 228년 만에 신흥 강자 거란의 공격으로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급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발해는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고려로 이어지며 우리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멸망의 원인
국제 정세 오판
9세기 말,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급부상하는 등 동아시아의 힘의 질서가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발해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군사적 대비에 소홀했습니다.
내부 결속력 약화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잦은 왕위 다툼 등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의 불안은 외부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겨진 유산
발해 멸망 후, 대조영의 후손인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 명의 발해 유민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들을 "친척의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며 후대하고, 왕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이로써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고려로 계승되었고,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